아시아 대륙에 가까운 야마구치현은 일찌기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아 기원전 2~3세기에는 벼농사 기술이 전해져서 수도경작을했습니다. 또 4~5세기경 야마토(大和)조정에 의한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현내는 7개 지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나아가 7세기에는 스오(周防)・나가토(長門)의 두 지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91)로부터 가마쿠라(鎌倉)시대(794년~1333년)에 걸쳐서는 지방의 무사단이 대두하여 스오 지역에는 오우치(大内)家, 나가토 지역에는 고토(厚東)家가 확고한 지위를 확립해 갔습니다. 무로마치(室町)시대(1338년~1573년)에 들어서자, 오우치家가 24대 히로요(弘世)때 보초(防長)두 지역을 평정. 야마구치에 교토(京都)를 본뜬 거리를 만들고 조선과 명과의 무역으로재력을 쌓으며 대륙문화의 도입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화려한 오우치문화가 꽃피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자랑하던 오우치家도 31대 요시타카(義隆)가 가신인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에 의해 쇠하게 되고, 스에家를 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이윽고 주고쿠(中国)지방의 거의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러나, 1600년의 세키가하라(関ヶ原)싸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墾)가 이끄는 동군에 패한 모리家는 스오・나가토 두 지역의 36만석까지 수입이 줄며 거성을 하기(萩)에 구축하게 됩니다. 그 이후, 모리家는 「防長의 三白(소금・쌀・종이)」이라고 하는 식산(殖産)정책을 추진하는 등 한(藩)재정의 기반 강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등 수많은 우수한 인재를 배출하여 조슈한(長州藩)은 메이지(明治)유신을 추진하는 중심적 존재가 되고, 근대 국가의 성립에 큰 역할을 다했습니다.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멸하고 메이지 (明治)정부(1868년)가 성립되자, 1871년의 廃法縣에 의해 현재의 야마구치현이 탄생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많은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화 정책을 추진, 그중에서도 근대 공업의 도입과 진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야마구치현에 있어서도 시멘트 제조나 기계 제사(製糸)공장이 설립되는 등 근대 공업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만 메이지 시대(1868~1912)는 대체로 농업중심의 현이었습니다. 다이쇼(大正)기에 접어 들면서 현내의 풍부한 광산자원과 좋은 항만 조건 등에 의해 세토나이카이 연안지역에는 조선, 화학, 기계, 금속 등의 공장이 연이어 건설되고, 쇼와(昭和)기에 들어서서도 성장을 계속하여 전후에는일대 석유 콤비나트가 형성되는 등 전국 유수한 공업현으로서 발전해 갔습니다.